Read

[소설] 황정은 - 연년세세

2022. 1. 4. 22:01

 

 

하고 싶은 말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감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p

//

그런데 엄마, 한민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81p

 

 

무명

수십년 살림으로 손이 굳고 곱았는데도 뜨거운 것에 닿으면 여전히 뜨겁다는 것이 이순일은 성가시면서도 경이로웠다. 공항동 시장에서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의 손, 그 손이 아예 빨갛게 익은 것처럼 보였던 것을 이순일은 기억했다. 순대를 달라고 말하면 그 아주머니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을 뜨거운 찜솥에 넣어 알맞게 익은 순대를 고른 뒤 적당한 길이로 잘라냈다. 도마에서 순대를 한입 크기로 써는 동안, 그는 달걀을 쥔 것처럼 오므린 손으로 순대를 눌렀고 앗 뜨거워, 앗 뜨거워, 하는 것처럼 손을 뗐다가 도로 내리기를 반복했다. 아주머니, 그 뜨거운 것을 평생 만지고도 여전히 그것이 뜨거우냐고 이순일은 묻고 싶었는데, 그런 것은 물을 수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소금을 너무 많이 주셨다고만 말했다. -141p

//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1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