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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장강명 - 당선, 합격, 계급
2021. 9. 28. 01:33
1. 장편소설공모전이라는 시스템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일부다. 입시(入試)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다만 이 '입시-공채 시스템'이 예전처럼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시험 자체가 부당한 계급사회를 만드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는 지망생들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경직성이 근본 원인이다. -17p
6. 공무원 시험 같은 느낌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로스쿨이나 학생부종합전형에 찬성한다. 잘만 운영되면 사시나 수능보다 더 나은 선발 제도라고 본다. 문제는 바로 그 '잘 운영되는가'다. 한국 사회는 그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 왜냐하면 경쟁은 치열한 반면 신뢰 수준은 아주 낮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공정성을 확실히 담보하지 못하는 제도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더라도 획일적으로 시험을 치러 점수를 기준으로 뽑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이런 분위기가 공채제도를 유지하는 큰 힘이기도 하다. -235p
7. 등단 연도를 언제로 할까요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첫째, 미등단 작가는 불이익을 당한다. 그 불이익의 내용은 미묘하다. '미등단 작가는 절대 안 돼.'라는 팻말이 어디에 붙어 있지는 않다. 아마 10년에 한번 나올 탁월한 작품을 쓴다면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주목을 받을 것이고, 문학계의 내부 사다리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면 불리한 처지에서 작가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잘 쓰면 될 것 아니냐'고 타박할 일이 아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당신 혼자 남들보다 1미터 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치자. 그런 조건을 '겨우 1퍼센트 불리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뛰면 된다'라고 여기고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둘째, 그런 불이익은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 없이도 발생한다. 문학 권력이라 불리는 출판사 관계자들이 문학 담당 기자나 방송 작가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작가를 소개해 달라, 그러지 않으면 재미없다.'라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출판사들은 수십 년간 성실하게 자신들의 기준응로 작가를 발굴하고, 그 작가들의 소설을 펴내고, 그 작품들의 성취를 설명하는 비평을 쌓아왔다.
그 결과 그런 작업의 일관성과 품질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방송작가들은 '검증'이라는 단어로 설명했고, 신문기자는 '안심이 된다'는 말로 표현한. 일종의 공신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권위가 되고, 그런 권위를 업은 신인과 그러지 못한 신인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메커니즘 자체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나? 한국 사회가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 대우하는 방식과 무척이나 흡사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 둔다. '누군가의 거대한 악의가 없어도 부조리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현재 아무도 악의가 없다.'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시험을 합격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넘어선 우월 의식을 틀림없이 품고 있다. 과거에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미자격자, 무면허자로 몰아 배제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다만 그런 흉한 생각을 품은 자들이 싹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이런 구조에서 배제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생기리라는 이야기다. -284p
8. 정보, 또는 당신이 간판에 맞서는 방법
한국 소설 시장과 노동시장에서 간판이 그토록 중요한 근본 원인은 그곳이 '깜깜이 시장'이기 때문이다.
책을 쓰고 만든 사람과 그 책을 읽을 사람, 구직자와 채용 기업 사이에 정보 비대칭성이 너무 크다. 정보가 적은 쪽은 손실을 피하는 안전한 선택을 하려 한다. 여기서 간판은 그 상품이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 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리고 그 간판으로 인해 신분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부조리한데, 그 부조리를 더 키우는 공통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어지간해서는 그 간판을 떼거나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간판의 영향력이 아주 오래간다. 이로 인해 시장 전체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313p
8.5 지뢰밭 앞에 선 병사
어떤 분들은 '알짜 중소기업 정보를 구직자에게 알려 주면 물론 좋겠지만, 정부가 어떻게 그걸 일일이 다 조사하겠나'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정부는 그걸 일일이 조사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그런 자료를 다 보유하고 있다.
크레딧잡은 어떻게 이런 수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국민연금 공단의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납부 데이터만으로도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다. 어떤 기업이 연봉이 높고 직원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지, 연봉은 적당한 수준이지만 직원이 퇴사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지, 연봉은 높지만 입사자와 퇴사자도 그만큼 많아 아마도 노동 강도가 상당하리라 예상되는지, 연봉은 높은데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은지, 연봉이 낮고 망하는 중인지, 초봉은 높지만 근속 연수가 쌓여도 임금이 잘 오르지 않는지, 반대로 초봉은 낮아도 고참이 되면 고소득을 누릴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공공기관의 조사가 끝나 법원에서 판결까지 내린 사안에 대해서조차 구직자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수한 중소기업이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바라본다'고 그들을 꾸짖는다. 가증스러운 기만이다. 지뢰밭으로 들어가기 주저하는 군인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꼴이다. -359p